사회를 보는 눈

민주당 운동권의 민낯은 새천년 nhk사건에서 제대로 드러남

투샷아인슈페너 2025. 5. 30. 18:10

https://cafe.daum.net/_c21_/%C2%A0https://theqoo.net/covid19/1778021432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1/02/17/2021021700199.html

요즘 검색하기 힘든 기사… 우상호 송영길 김민석 '5·18 룸살롱 술판'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예비후보 등 민주당 '386세대'가 연루된 이른바 '새천년NHK주점' 사건을 보도한 과거 기사가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 200

www.newdaily.co.kr



518 전날에 여자끼고 룸싸롱에서 술마시는
민주당 의원들 ㅋㅋ
거기다 동료 여자 의원 폭행하기까지
대단하다

이게 광주 정신인가?

이런 애들은 민주당이라고 우쭈쭈해주고
표주고 민주화 운동 피해자에 보상금까지 거절하고
매년 518 참배하는 김문수 후보한테는
문전박대하고 참배 거절하는게 광주 정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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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전야제랍시고 모여서 룸쌀롱간것도 모자라, 인사드리려고 간 여자국회의원 폭행한 사건이야.
아래는 피해자가 직접 쓴 글임.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러가지 일로 잠시 서울에 온지가 벌써 한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오자마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많이 아팠고 - 거의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 개인적인 일들이 많아 많은 분들께 연락도 못드리고 한달을 보냈습니다. 혹시 저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연락도 안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귀국을 한 가장 큰 이유는 5.18 전야제의 사회자로 행사준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그날, 5월 17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여러분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5월 17일 아침, 저를 포함한 전야제 관계자들은 아침 9시에 망월동 묘역에 가서 참배를 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서보니 오후 1시에 여야 386 당선자들이 참배를 온다고 하더군요. 저는 광주에 온 김에 저와 절친한 임종석씨와 만날수 있을까 해서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광주에 내려오는 중이라며 1시에 꼭 만나자고 하더군요. 저는 이미 참배를 한 상황이고 오후에는 전야제 리허설이 있어서 사실 망월동에 다시 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러 선배들에게 이 기회에 한번에 인사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다소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일부러 다시 망월동으로 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당선자들 뿐만아니라 낙선한 분들도 같이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저는 그 선배들을 보며 든든하고 흐뭇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광주에서 하루 머물 예정이라며 저녁에 시간이 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5.18 전야제 행사에 참가했구요.

다소 서언이 길었는데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전야제가 다 끝나갈 무렵 정범구 박사가 제가 있는 무대 앞으로 오셨습니다. 정박사님과는 기독교방송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상당히 친한 관계입니다.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시며 행사가 끝나면 꼭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저는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전야제 사회를 보며 저녁밥도 쫄쫄이 굶어가며내내 서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뒷풀이 장소에서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지요. 그때 정박사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일행이 있으니 저보고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대부분 낮에 망월동에서 만난 분들이었지요. 저는 여러사람들 모인 곳에 가기가 뭐해서 처음엔 안 가겠다고 했는데 대여섯 차례의 전화를 계속 받고보니 그곳에 안가는 것이 참 결례인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장소가 어디인지를 물으니 새천년이 어쩌구 NHK가 어쩌구 하시대요. 저는 새천년 민주당 사람들이 NHK 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곳은 새천년 NHK 라는 가라오케였습니다. 어쨌든 그곳으로 가서 그분들이 계신 룸으로 들어갔습니다. 찾을 것도 없이 적어도 7-8개의 룸이 있는 그 술집의 손님이 있는 방은 그 방이 유일했습니다.

문을 열자 송영길 선배가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더군요. 박노해 시인은 아가씨와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김민석 선배는 양쪽에 아가씨를 앉혀두고 웃고 이야기하느라 제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크를 잡고있던 송영길 선배님은 저를 보고 같이 노래를 부르자는 듯이 손짓을 하셨고 얼핏보기에 정범구 박사를 포함하여 김성호, 장성민, 이종걸, 김태홍, 이상수 의원 등이 있더군요. 저는 아가씨들이 있건 말건 선배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려고 다가서는 순간 누군가

제 목덜미를 뒤에서 잡아끌며 욕을 하더군요. 야 이-년-아, 니가 여기 왜 들어와, 나가...
믿고싶진 않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우상호씨였습니다.
술집 아가씨들은 놀라서 모두 저를 쳐다보았고,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우상호는 -미안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 더이상 존칭을 붙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했습니다.

이-놈의 기-집-애, 니가 뭔데 이 자리에 낄려고 그래? 미-친-년...

저는 일단 방을 나와 저와 함께 온 전야제팀이 앉아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참외를 하나 집어들었는데 우상호가 들어와 앉더군요.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 그 기-집-애, 이-상-한 년-이네. 아니 지가 뭔데 거길 들어와, 웃기는 기-집-애 같으니라고...

한두번도 아니고 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참외를 테이블에 던지며 저도 욕을 한마디 했지요.
이런 씨-*, 어따대고 이-년 저-년이야. 나두 나이가 30이 넘었고 애기엄만데 어디서 욕을 해...라고요.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시정 잡배들의 오고가는 대화도 아니고 참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계속 하겠습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술이 꽤 취해있긴 하더군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의 불만은 이것이더군요. 서울에 온지 3주가 지났는데 제가 연락을 안 했다는 것, 5.18 전야제 사회를 본다는 소리를 듣고 임수경 이름 또 팔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발언중간 중간 이-놈의 기-집-애, 저-놈의 기-집-애, 이-년, 저-년 소리는 계속 되었구요. 그러더니 마무리를 하면서 자리에 있던 광주의 김태홍 당선자 에게 선배님, 죄송합니다...하더라구요.

저는 그랬죠. 국회의원이라고 선배님이고 죄송하냐고... 나는 내가 존경하던 선배에게는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이-년 저-년 소리 듣고 끌려나와야 하고, 같이 고생하던 후배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이 국회의원한테만 미안하냐고...우리같은 사람들은 아가씨들 나오는 술집에서 양주마실 팔자가 안되니 나가서 소주나 먹자고..

. 그리고 나왔습니다. 모두 일어서는 순간 우상호가 테이불에 있던 양주의 병을 새로 따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계산대
로 갔습니다. 이미 정범구 박사가 계산을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명세서를 조목조목 써달라고 했습니다. 양주 두병에 음료수, 안주가 서너가지로 22만 7천원이 나왔고, .양주 한병과 안주 한접시는 서비스였답니다.

저는 술집 아저씨한테 물었죠.
난 이집에 처음으로 오는데 이집은 처음 오는 사람한테도 서비스를 주느냐, 우리는 서비스 받을 일이 없으니 모두 계산서에 넣으라고 말이죠.
그 아저씨는 그냥 서비스로 드시라고 했고, 저는 계산을 하겠다고 부득불우겼습니다. 그 아저씨는 좀 황당했겠지요.
서비스 주고 욕먹고...

아무튼 계산은 하되 다는 못 내겠다, 양주 한병은 우상호가 땄으니 저 사람에게 꼭 받아라, 이미 계산한 돈은 정박사에게 꼭 돌려줘라 당부를 한 후 20만원을 저와 함께 전야제 사회를 본 송선태 선배님의 카드로 계산을 했습니다.

계산대에서 실랑이를 하며 저는 그랬습니다. 낮에는 검은 넥타이 매고 망월동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밤에는 아가씨끼고 술 먹고 잘들 한다 등등... 술마시고 노래부르며 떠들던 그 방에서는 아주 조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한 말을 다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가라오케 술집을 나서며 송선태 선배님에게 술값은 나중에라도 꼭 갚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지갑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송선배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지만 저는 정말 갚을 생각입니다. 그때 우상호가따라오더군요. 수경아, 이-놈의 기-집애야, 너 거기 안 설래?? 아, 이 구제불능의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우상호, 당신하고는 이제부터 끝이야, 우리서로 아는 척 하지 맙시다. 나 정말 당신하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는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제 친구들은 다 압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세사람을 대라면 그중에는 항상 우상호 형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단순히 술취한 우상호에게 욕먹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글을 쓰고있지는 않습니다. 386, 사람들은 386이 어쩌구 하며 회의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저는 386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資笭윱求� 그 386의기반은 바로 5월의 광주입니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그것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지속되었습니다. 광주를 떠나서는 386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저는 선배들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월의 광주에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광주의 라디오방송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도 않습니다. 그 커다란 가라오케에 그들이 유일한 취객이었다는 것이 말해주듯이 광주 사람들은 5.18이 되면 먹고 노는 일을 자제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망월동 참배를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는 사람들이, 386을 내세워 국회의원 선거전에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다는 사람들이, 낮에는 망월동에서 광주의 영령을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광주의 정신을 밟아버렸습니다.

만약 5.18 유족이 이 사실을 안다면, 386의 순수성과 역사성으로 그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그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겨누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동지들이, 5월 17일 하루종일 아들의 무덤 곁에서 참배객을 맞고 계시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감히 주문합니다. 386의 이름을 더이상 들먹이지 말던가, 망월동 참배가 아닌 놀러왔다고 하던가, 한때나마 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더이상 믿음도 희망도 걸 곳이 없음에 앞이 캄캄합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386 당선자가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에 났더군요. 술에 취했던 그들은 다음날인 5.18 아침에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밤새 광주 영령을 진심으로 추모했다는 듯이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요.

제가 밥도 굶어가며 다섯시간씩 서서 전야제 사회를 보던 그 시간에 내가 존경하던 선배들은 아가씨와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면서, 오히려 나보고 5.18에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말한 사실 역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경, 제 휴대폰 벨이 울리더군요. 저는 그들 중의 한명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상호와의 선거전에서 승리한 이성헌 선배였습니다. 망월동에서 만났는데 반가왔다는,서울에 올라오면 꼭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습니다. 이성헌 선배는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두차례 만난 것이 전부인데도 우리나라로 귀국하실때, 또 귀국을 해서도 저에게 미국까지 수시로 전화를 하던 분입니다. 전화를끊으며 생각했습니다. 왜 이성헌이 당선되고 우상호는 선거에서 떨어졌는가를...

그후 며칠 동안 저는 그들로부터 단 한통의 전화도, 제3자를 통한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느닷없이 그 자리에 잇었던 김성호 당선자가 전화가 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더군요. 통화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그날의 사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상호와 아는척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다음 날인 오늘, 우상호가 전화를 했더군요. 아마 김성호씨가 무슨 말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여보세요, 임수경씨 부탁합니다.

전데요.
수경아, 나 상호야.
누구시죠?
나 ;야, 우상호.
저는 우상호라는 사람을 모르는데요...
수경아, 미안하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새천년 NHK 는 가라오케를 나설 때 처럼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한낮 버스정류장에서 땡볕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다가 받은 전화 한 통, 그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저를 심란하게 만듭니다. 제 어머니는 우상호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고, 저와 친한 선배언니는 아주 잘했다고말했습니다.

저는 잘 한걸까요, 잘못한걸까요...
긴 글을 마칩니다. 결국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셈이 되어버리긴 했는데, 제 개인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임수경 올림
 
 
 
 
아 임수경이 뭔데? 하는 분들을 위해 퍼옴
 
# 북한에 핵폭탄 이상의 충격을 안겨준 사건!!!!! `임수경 방북사건`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며 20대 국회의원 공천에서는 하위 컷오프(···)로 당분간 정치를 떠나게 되었음.

탈북자에 대해서 막말도 하고 당내에서도 거친 언사로 트러블메이커의 이미지에 안티도 많이 있긴 하나, 이분이 소싯적에는 북한 정권 수립 이래 가장 거대한 충공깽을 주민들에게 선사했던 현대사의 주인공이라는거.

 

그렇다면 '임수경 방북사건'은 도대체 무엇이며, 북한에 어떤 층격을 안겨주었단걸까?

 

 

 

때는 1989년.

한국이 1년전 냉전체제의 붕괴를 상징하는 동서화합의 장이자 가장 성공한 올림픽이라고 평가받는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음.

 

물론 북한은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그 순간부터 배알이 꼴렸었고 자기들이 가진 나름의 외교망을 총동원해서 유치를 방해하려 했지만 결과는 실패.

 

1986년에 김포공항 폭탄테러사건, 1987년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파 테러사건 등등 온갖 치졸하고 야비한 방법을 동원해서 올림픽을 훼방놓으려 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실패.

 

그래서 북한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1989년 제 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이란걸 개최하게 됨.

세계학생축전이란  사회주의 국가 청년들의 문화, 스포츠, 학술 대회 등을 총망라하는 행사로 냉전 시기 제 3세계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로 개최되었던 나름대로 규모있던 이벤트.

 

177개 국가, 약 22,000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북한 정부도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의 행사를 개최했다고 선전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려 했음.

 

하지만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이후 동구권 공산 독재 체제의 붕괴와 함께 똥망 테크를 타버렸고(…) 가뜩이나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힘든 행사를 무리하게 개최한 북한측은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음.

 

이때 평양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온갖 과시용 건물들을 뚜덕뚜덕 지어대었고 사회주의 국가의 관광단을 초청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종의 과시용 성격이 강했던만큼 고스란히 북한 경제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는 북한 경제가 몰락하는 계기가 됨.

 

그때 만든 희대의 돈지랄능라도 5.1 경기장

 

각설하고, 이때 북한은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냄. 올림픽 이후 해빙 분위기 덕분에 잘하면 방북이 이뤄질수도 있었는대, 하필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 때문에 정부에선 전대협의 방북을 전면적으로 불허하게됨.

하지만 임수경은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일본 - 서베를린 - 모스크바 - 평양 경로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게 됨.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폭탄을 떨어뜨림!

사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당시 온갖 밀입북 사건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헐 이제는 꼬꼬마 대학생도 북한에 들어가네' 정도로 그냥 튀는 애구나.... 정도로만 생각한 반면, 북한 사회에선 사실상 핵폭탄이 터짐. 실제로 후폭풍까지 있었다는 점에서 진짜 핵폭탄이었다는거!!!

 

당시에 방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남자들로 남한에서도 제법 명망을 지녀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았지만, 임수경은 중산층 자제에 아직 앳된 평범한 대학생이었음!

 

거기다 임수경의 모습은 노동운동이나 민족운동에 투신한 투사의 모습이 아닌 그냥 흔하디 흔한 발랄한 남한 대학생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

 

 

당장에 북한의 관심은 임수경에게 집중!!!!!

오죽하면 북한 언론이 김일성보다 더 많이 취재하려고 했던 유일한 인물이란 평가까지 있을 정도!!!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

 

그런 상황인만큼 북한에서는 선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상투적인 선전 방문을 준비했지만, 북한의 뜻대로 안됨.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옴.

 

처음에 와서 한 말이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ㄷㄷㄷ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로 취급받을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컴퓨터를 보고는

 

"어,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주는건 물론, 앞서 말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 역시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

심지어 세습정치까지 물고 늘어지며 거침없이 비판을 해서 북한측 안내원들을 경악시킴.

 

특히 북측이 미리 준비해둔 조선은 하나다라는 선전문구를 끝끝내 거부하고 조국은 하나다로 고치게 만들고, 학생들이 선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라고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하고....

 

 

하지만 이런 비판적이거나 도발적인 발언보다는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북한 사람들은 엄청나게 열광함!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임수경은 인기 정상의 아이돌과 같은 대인기를 얻음!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 운동화)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문화컬쳐컬쳐쇼크었던 것.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옷을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여성이 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음.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라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었다고.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은건 물론,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함.

 

근데 이후에 이 두 노래는 북한에서 대유행했다고....

 

오죽했으며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임수경의 선전전(?) 덕분에 의도치 않게 이득을 본 남한 정부에서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할까.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음.

임수경이란 인물 자체가 당시의 북한의 젊은층에게 굉장한 충격이었기 때문.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됨.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대유행함!!!

 

또한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느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었음.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투쟁(사실상의 사상통제)을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

 

 

물론 임수경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과 동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감옥에 갇힌 임수경이 북한 사회에 다시한번 충격을 주게 됨.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

 

당연히 '통일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

 

헌데 임수경의 집에 들이닥쳐보니 임수경의 가족들은 정말로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게 됨.

 

물론 임수경의 가족도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에 고초를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언니는 직장에서 잘리고 서울지하철공사 간부였던 부친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얼마뒤에 사직했지만,

 

북한에서는 누군가가 밀입남했다가 돌아올 경우 본인은 사형,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수용소로 들어가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판이었으니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일 수밖에.

 


더구나 그런 범죄자의 집안에 (북한 기준으로)그 귀한 컬러 TV, 파, 냉장고 등 온갖 가전제품이 있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 온갖 과일 등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감.....

 

체제경쟁에서 졌다는 걸 TV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며 그야말로 망했어요.

 

충격은 임수경의 재판에서도 이어짐.

 

북한은 임수경이 15년 구형에 5년 징역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지만, 제대로 된 재판을 열고 사형이 아니라 15년형을 구형받고, 겨우 5년형만 받았다는 사실이 북한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짐(···)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3년 반만에 출소했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보도되어 충공깽!!!!!

반역자를 가석방하는 남한 정권이라니....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판문점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

근데 감옥에서 편지와 일기를 쓰고 책도 읽었다네!!!! 럴수럴수 이럴수가!!!!

 

 

이렇게 임수경은 전혀 본인이 예상도 못한....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북한 주민들의 인식을 단번에 깨버리며 핵폭탄급의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남북간의 체제전쟁에서 가장 엄청난 공을 세운 승리투수(···)가 되어버림.

 

90년대부터 이어진 북한의 경제몰락과 식량난 등을 견디다 못한 북한 주민들이 남한에서의 삶을 꿈꾸며 탈북자가 급속도로 증가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음.

 

 

 
 
https://www.factfinder.tv/news/view.php?idx=1420

유시민의 칭송받은 항소이유서, 그리고 동지에게 칼을 겨눈 진술서

유시민은 60살이 넘어 뇌가 썩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25살 유시민은 민간인 집단 폭행 치사 사건의 책임을 학생회장 이정우에게 떠넘겼다. 학생회장에게 책임이 있지 자신에겐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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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정신 가장 무시하고 이용해먹기만 하는게 민주당^^
광주정신, 위안부, 세월호 등의 아픔을 이용하는 쪽 누구? 민주당^^
옛날 운동권 남자들이 자기들이 힘든거 보상심리 때문에 같이 민주화운동했던 여자들 착취해옴. 
호남과 여자를 기반으로 살아남은 놈들. 저들이 진짜 약자를 위하고 정의를 숭배하며 민주를 외치는 거 같음??? 
지금 내란팔이 하듯이 똑같이 장사 마케팅하는 추잡한 것들임. 이쯤되면 운동권 가짜진보팔이들의 민낯과 실체에서 그만 벗어나서 현실을 제대로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