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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 6월 항쟁

투샷아인슈페너 2024. 6. 15. 01:26

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故 이한열 군의 장례식 행렬. 무려 10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였고 발인 행렬이 출발한 연세대학교의 신촌거리부터 종로 일대까지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 촬영.
 
고명진 기자는 훗날 '흔들리는 나의 조국' 을 보았다고 술회했으며 이 사진은 1999년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개최되었던 "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 고 외치며 뛰어가는 장면이다. 참고로 사진에서 뛰어가는 시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언론사들과 기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간혹 위 사진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사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의 대표 사진으로는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유명하다.
 
 
 
6월 항쟁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당시 헌법 중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에 대한 반발로부터 촉발되었다. 
이로 인해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시작된 27년 간의 '제도적인' 군부독재는 종결되었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도적인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민주화 선언 이후 직선제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역시 하나회의 실세였으며, 노태우 정권 내내 여전히 정(政)·관(官)·군(軍)에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실세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1991년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의 유혈 진압,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 등의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행동도 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군부독재의 끝과 민주주의의 시작은 노태우가 퇴임하고,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 본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6월 항쟁의 시작은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면서 책상을 내려쳤는데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명언이다. 저 제목을 사용한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

그런데 박종철군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군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묵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국민들의 민심을 격앙시켰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이 발표된 과정이 매우 극적이었다. 
당시 고문치사 사건 주범들은 사건 축소, 은폐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우연히 근처 방에 수감중이던 사회운동가 이부영이 듣게 되어 교도관에게 문의했더니 박종철 사건이 은폐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온 것. 
이부영씨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관련 내용을 휴지에 써서 면회인을 통해 전달했고, 
이것이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되어 발표하게 된 것이다.

여론은 폭발했고, 이에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이때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뭉쳐 종로로 나왔다. 
이 날 시위에는 이전과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드러누워 집회를 하다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6월 초, 국본은 서울시내에 약 20만장의 전단을 뿌려 집회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2천여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전집회가 끝나고 교문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의 후두부(뒤통수)에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당시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로이터 통신에 사진의뢰를 했는데, 문제의 사진을 받았고 위험성이 큰 사진이었으나 
사진부장이 코렁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사진을 키워 신문에 게재했다는 일화가 있다. 
해당 사진은 후에 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한편 연세대에선 동료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예비역 출신부터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연세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6월 10일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의 별짓을 다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대성당을 수 일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또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타넘어 어찌어찌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일담에 보면 이러한 조치 때문에 도리어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회사는 일찍 끝났는데(조기퇴근), 집은 못가고(지하철 무정차), 서머타임으로 인해 날은 밝으니 자연스레 데모대에 합세할 환경이 갖춰진 것. 
당시 시대상을 그린 100℃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집회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의 멍청한 대응을 비웃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명동성당에는 당시 故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성당에, 그것도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계 전체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손을 뻗을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쇼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 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 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88올림픽은 그대로... 결국 명동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여담으로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 박원순  인권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양복 정장을 착용한 변호사들의 복장을 경찰들이 정부 관료로 오인하여 처음에는 달리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허나 곧 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재빠르게 접근을 막아세웠고 변호사들의 접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

 
 
 
 
 

 

정을 든 사람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그 왼쪽의 키큰 남성이 문재인 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 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前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 단독으로 한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각하(전두환 전 대통령)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 면서 전두환을 설득하여 즉각적인 군 투입은 막았다. 
그러나 6월 19일 군부대 투입을 통한 무력진압을 실시하기로 최종결정이 났으며 수도권 외곽에 주둔중이던 충정부대들을 
서울 외곽지역에 집결시켰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진압으로 소요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보고를 하였다.

무력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청와대에서 19일에 주한미군에게도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통보하라고 지시는 내려갔지만 정작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되진 않았다.

CIA 한국 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강한 반미 감정과 군부대 투입의 악영향을 경험한 미국은 한국군의 무력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CIA가 주한미군의 협조를 받아 전차5대를 차출하여 수도방위사령부 육군특수전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한국이 단독으로 움직일수 있는 부대들의 정문에 전차를 보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한국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행동은 효과를 발휘하여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일부 예비역 장병들의 증언에 나오는 주한미군 전차와 한국군 진압부대가 부대 정문에서 대치하였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6월 20일 오후에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전두환에게 미국 국무부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인 즉슨 계엄령 선포하는 순간 한미동맹은 끝난줄 알아라. 
 
한마디로 군부대 동원해서 민주화 운동 진압하면 전두환을 날려버리겠다는 경고나 다름없었으며, 결국 전두환은 군 투입 명령을 입밖에도 꺼내지 못함으로써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 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미 주한미군이 계엄군을 직접 막기 위한 사전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만약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 했으면(...). 게다가 미국이 막지 않아도 불가능했던 것이 군 내부에서도 시위 진압에 대해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기에 작정하고 진압을 명하면 오히려 그 군인들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청와대로 쳐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전두환의 측근들이 대놓고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권할 정도였으며, 전두환 본인이 생각보다 의외로 쉽게 직선제를 수용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국 상원에서 대한민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6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6월 항쟁의 마지막은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군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이 때 무려 100만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데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도시 봉급자(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저녁 9시까지도 햇빛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강남 아파트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은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와 지역과 빈부 격차를 떠나 거국적인 여론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아홉 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1987년 체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정치적, 헌법적으로는 분명 현재까지도 한국은 87년 체제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87년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앞선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경우 4.19 혁명의 배경으로 50년대 말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이, 
박정희 - 전두환 정권 교체기 부마민주항쟁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배경으로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이미 다각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경제적인 변화가 정치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도 실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의 경우 3저 호황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가 순항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 앞서 다룬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출처: 나무위키
 
 
https://youtu.be/MOYWKcxYKk4